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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읽히는 소설과 설익은 징징거림 — 《87년생 김지영》, 혹은 피해자 되기 콘테스트의 시대에 대하여

편집부 칼럼

소설을 평가할 때 ‘잘 읽힌다’는 말과 ‘잘 쓰였다’는 말은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흔히 ‘잘 쓰인 소설’이라 상찬받곤 하는 《87년생 김지영》(원제의 숫자가 82년생이든 87년생이든, 이 서사가 소비되는 방식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는다)의 가장 큰 미덕은, 정확히 말하자면 문학적 성취가 아니라 압도적인 ‘가독성’에 있다. 그것은 일찍이 《그놈은 멋있었다》나 《옥탑방 고양이》 같은 초기 인터넷 소설들이 증명해 보였던 바로 그 미덕, 즉 독자에게 아무런 사유의 저항감도 주지 않은 채 활자를 매끄럽게 삼키게 만드는 통속적 흡입력과 정확히 같은 과(科)의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단점은 그 유일한 미덕을 아득히 압도할 만큼 치명적인데,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끝없이 ‘징징거린다’는 점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오직 자신의 슬픔만이 이 세상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슬픔인 양 말하는 나르시시즘적 투정이 서사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문학이란 결국 보편을 지향하는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냐고. 맞는 말이다. 그러나 ‘개인의 특수한 고통이 타인의 삶과 공명하며 보편의 지평으로 확장되는 것’과 ‘나의 불행을 세상의 중심으로 놓고 타인에게 도덕적 부채감을 강요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다. 질문해 보자. 만약 이 소설의 태도가 보편이 된 세상이 있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단언컨대 그것은 모두가 서로의 상처를 과시하며 우위를 다투는 ‘피해자 되기 콘테스트’의 세상이다. “나는 언제나 무결한 피해자이니, 그렇지 않은 네가 영원히 사과하라”고 다그치는 세상, 약자라는 정체성이 곧 타인을 심판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권력이 되는 도착적인 세상이다.

이 기이한 현상 앞에서 우리는 한 가지 서늘한 역설을 목도하게 된다. 진짜 야만의 세계였다면, 다시 말해 물리적 폭력과 약육강식의 논리가 지배하는 날것의 세계였다면 강자들 앞에서 감히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을 존재들이, 역설적이게도 이 사회가 간신히 이룩해 낸 문명적 안온함 속에서 가장 사나운 만용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안전하게 불평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어 준 바로 그 사회의 안온함을 딛고 서서, 그 안온함을 일구어 낸 사회 전체를 향해 가혹한 저주를 퍼붓는다. 안전이 보장된 공간에서만 발휘되는 투쟁성, 그것은 용기가 아니라 응석이며 저항이 아니라 만용이다.

클림트풍 삽화: 금빛 모자이크 옷을 두르고 웅크린 인물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문학은 인간이 겪는 아픔에 대해서도, 슬픔에 대해서도 마땅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아니, 이야기해야만 한다. 그러나 고통을 ‘다루는’ 것과 고통에 ‘침잠하는’ 것은 천양지차다. 자신의 아픔과 슬픔에만 자기연민적으로 침잠하여 세계의 복잡성을 지워버리는 작품이 대체 무슨 수로 예술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예술은 상처를 과시하는 전시장이 아니라, 상처 입은 인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자신의 품위를 지켜내는가를 묻는 윤리적 형식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이 세상이 《87년생 김지영》의 어조를 닮아가는 것, 저마다의 설익은 징징거림으로 가득 차오르는 풍경이 진심으로 두렵다. 만약 이것이 우리가 도달한 ‘시대정신’이라면 그보다 끔찍한 일은 없을 것이다. 타인의 고통을 헤아리는 대신 나의 피해자성을 증명하는 데 몰두하는 소설, 이토록 납작한 투정의 기록이 시대의 베스트셀러로 추앙받는 세상이란 또 얼마나 어둡고 숨 막히는 세상인가.

이해의 반댓말이 혐오가 아니라 ‘동경’이듯(우리는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타자의 숭고함 앞에서 비로소 동경을 배운다), 이 책이 서 있는 자리의 정반대편에는 이윤 리(Yiyun Li)의 《자연의 것들은 그저 자란다》가 놓여 있다. 두 아이를 모두 자살로 잃은 뒤라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밑바닥의 심연 속에서 쓰인 그 책의 태도는 ‘김지영’의 태도와 정확히 대척점에 서 있다. 이윤 리는 세계를 향해 사과하라고 소리치지 않으며, 자신의 비극을 특권화하지도 않고, 슬픔을 무기 삼아 타인을 도덕적으로 겁박하지도 않는다. 다만 감당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자연의 것들이 그저 자라나듯, 부서진 삶을 묵묵히 견뎌내는 인간의 조용한 위엄을 보여줄 뿐이다.

에곤 실레풍 삽화: 어린 식물이 자라는 정원 곁에 앉은 스웨터 차림의 사람

고통을 겪는 방식에도, 그 고통을 문장으로 옮기는 방식에도 분명 격(格)이 있다. 설익은 징징거림과 진정한 비극적 성찰 사이의 거리는 그토록 멀다. 그러니 당신이 읽고 싶은 것이 시대의 공기에 편승한 자기연민의 투정이 아니라 진짜 ‘예술’이라면, 《87년생 김지영》을 덮고 이윤 리의 책을 펼쳐야 한다. 문학이 인간을 더 작고 신경질적인 존재로 만드는 대신, 어떻게 더 깊고 단단한 존재로 지탱해 주는지를 그 책이 증명해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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