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외주(外注)와 불량품의 납품 — 이원하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에 대하여
편집부 칼럼
거친 욕설 한마디로 배설하고 말면 그만일 심상을, 굳이 ‘시(詩)’라는 장르의 이름을 빌려 활자화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시 같지도 않은 문장들을 적어놓고 시인이랍시고 행세하는 풍경 앞에서, 독자인 우리는 왜 참담함을 넘어 모종의 분노마저 느끼게 되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왜 시를 읽는지, 다시 말해 시인과 독자 사이에 맺어진 암묵적인 ‘계약’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먼저 말해야 한다.
현대의 삶은 팍팍하고, 사람들은 당장의 생계를 유지하고 돈을 버느라 자신의 내면을 세밀하게 들여다볼 시간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삶 속에서 마땅히 느꼈어야 했으나 미처 느끼지 못한 응집된 감성이나 심상들을 시인이라는 전문가에게 ‘외주’를 준다. 세상의 속도와 생활의 피로에 빼앗겼던 나의 마땅한 감정들을, 시인이 정교하게 벼려낸 언어를 읽는 순간 비로소 되돌려받는 것—그것이 우리가 시집 한 권의 값을 지불하는 이유다. 그런데 여기, 우리가 세상에게 빼앗긴 감정을 되찾아주기는커녕 내 안에 남아 있던 마땅한 감정의 자리마저 황폐하게 빼앗아 가는 시집이 있다. 이원하의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를 읽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탄식은, 이상화의 오래된 문장을 빌리자면 바로 이것이다. 아아,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시집의 한 대목을 구체적으로 읽어보자.
선배 안녕하세요 여기는 여름이에요 이맘때만 되면 출몰하던 기억들이 그리워지네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다시 만나게 될 줄 알았어요 이렇게 될 줄 몰랐어요 어디에 있든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얼마 전에 친구가 저를 배신했는데요 선배와 친하지만 저를 괴롭혔던 사람들에게 돌아갔는데요 아마 선배에게 저는 더 이상 좋은 사람 아닐지 모르지만 행복을 빌어준다면 조금은 선해지나요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아프지 마세요 이젠 나와 당신 만날 수 없으니까
이 문장들이 왜 시가 될 수 없는지, 아니 왜 나쁜 산문조차 될 수 없는지를 두 가지 층위에서 짚어보자.
첫째는 어휘의 무책임함이다. “이맘때만 되면 출몰하던 기억들이 그리워지네요”라는 구절을 보자. ‘출몰(出沒)하다’라는 단어는 귀신이나 도적, 혹은 괴수처럼 부정적이거나 위협적인 대상이 불쑥 나타나고 사라질 때 쓰는 말이다. 그리움의 대상이 되는 기억을 수식하기에 이 어휘는 전혀 적확하지 않다. 물론 누군가는 이를 두고 ‘시적 허용’이나 ‘낯설게 하기’를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시적 허용이라는 독자의 너그러움은 그 일탈이 기존의 어법을 넘어서는 미학적 아름다움이나 전율을 성취했을 때만 발휘되는 특권이다. ‘출몰하던 기억’은 적확하지 않을뿐더러, 시적 허용이라는 아량을 베풀 만큼 예쁜 표현도 아니다. 그것은 고심 끝에 선택된 파격이 아니라, 모국어의 결을 감각하지 못하는 무신경함의 산물일 뿐이다.
둘째는 그 뒤로 이어지는 언어들의 태도, 곧 조악한 자기연민이다. 방금 인용한 시행들의 뼈대를 추려보면 결국 무엇이 남는가. ‘재회할 줄 알았다. 못 만날 줄 몰랐다. 어디에 있든 행복해라. 그런데 누가 나를 배신했고, 내가 조금 착해 보이고 싶다.’ 요컨대 상투적인 안부 인사와 사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끝없는 징징거림의 나열이다. 일기장 구석이나 심야의 메신저 창에 배설하고 지워버려야 마땅할 미숙한 푸념들이, 오직 행갈이가 되어 있다는 이유만으로 시 행세를 한다.
다시 ‘감정의 외주’라는 비유로 돌아가 보자. 내가 팍팍한 삶을 견디느라 시인에게 외주를 맡긴 소중한 감정이, 고작 이토록 부정확한 어휘와 설익은 징징거림으로 재구성되어 납품된다면 독자는 어떤 심정이겠는가. 단언컨대 그것은 계약 위반이며, 당장이라도 외주사 사장의 멱살을 잡고 흔들며 환불을 요구하고 싶은 참사에 가깝다. 시인이 언어를 다루는 노동을 포기할 때, 독자는 감정을 돌려받는 대신 모욕감을 돌려받는다.
근래 출판계 안팎에서 한국 문학의 본산이라 불리던 문학동네가 위기에 처해 망한다거나, 혹은 누군가에게 매각된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물론 이 시집 한 권을 냈다고 해서 그 거대한 출판사가 기울어진 것은 아닐 테다. 그러나 최소한의 문학적 검수 장치도 작동하지 않은 듯한 이런 수준의 시집에 ‘시인선’이라는 권위를 부여해 세상에 내놓는 출판사라면, 그 몰락의 징후는 이미 내부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니 만약 지금 이 시점에 저 출판사를 비싼 돈을 주고 인수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두 가지 가능성 중 하나를 의심해 볼 수밖에 없다. 문학의 언어를 전혀 해독하지 못하는 사실상의 문맹이거나, 아니면 눈앞에 날아다니는 파리와 창공을 나는 새를 구별하지 못할 만큼 심각한 시력 및 인지의 장애를 겪고 있거나. 파리를 새라고 부른다고 해서 파리가 시(詩)의 창공을 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원하의 시집이 증명하는 것은 오직 그 서글픈 사실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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