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려 깊음이라는 포즈, 혹은 성찰 없는 진영의 기록 — 최규석의 《송곳》에 대하여
편집부 칼럼
어떤 작가를 수식하는 상찬의 말들은 때로 그 작가의 성취보다 그를 호명한 시대의 빈곤을 먼저 폭로한다. 최규석이라는 이름 앞에 습관처럼 따라붙곤 했던 ‘한국의 켄 로치(K-Ken Loach)’라는 별칭이 그렇다. 노동자의 삶을 다룬다는 소재적 유사성만으로 그에게 헌정된 이 과분한 왕관을, 나는 조금 더 정확하고 냉정한 발음으로 고쳐 부르고 싶다. 그는 ‘K-켄 로치’인가, 아니면 진영이라는 안온한 숙주의 그늘에 기생하며 타자를 재단해 온 ‘카카로치(K-Cockroach)’인가. 이 다소 가혹한 명명이 단순한 악담이 아니라 하나의 비평적 테제(thesis)가 될 수 있는 이유를, 그의 대표작 《송곳》과 그 전후의 궤적을 통해 차근차근 복기해 보려 한다.
먼저 기원의 자리로 돌아가 보자. 최규석이 이른바 좌파 문단과 비평계의 총아로 떠오른 결정적 계기는 아기공룡 둘리의 세계관을 비튼 작업(리메이크라 부르든 스핀오프라 부르든 본질은 같다)이었다.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사회는 경제적 지표로나 시민적 의식에서나 개발도상국과 선진국 사이의 어정쩡한 회색지대 어딘가를 통과하고 있었다. 타인의 창작물과 지적 재산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감각이 아직 보편적 윤리로 정착하지 못했던 그 시절의 느슨함이, 타인의 캐릭터를 빌려 온 작업을 ‘사회 비판적 패러디’이자 ‘참신한 전복’으로 둔갑시켰다. 남의 세계관을 빌린 작업이 진보적 제스처와 결합할 때 손쉽게 찬사가 되던 시대적 미숙함 속에서, 그는 손쉽게 ‘의식 있는 작가’의 지위를 획득했다.
그렇게 몇 편의 정치적 우화들을 거쳐 그가 네이버 웹툰이라는 대중적 플랫폼의 데뷔작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송곳》이다. 주지하듯 이 작품은 이랜드 홈에버 파업 사태라는 실재했던 비극을 소재로 삼고 있으며, 노동운동가 하종강을 모델로 한 ‘구고신’이라는 인물의 입을 빌려 노동법과 계급투쟁의 당위를 설교한다. 문제는 실존했던 사건과 살아 있는 사람들을 다루는 작가의 태도에 있다.

하나의 첨예한 현실적 갈등을 오직 한쪽 편의 서사로만 전유하고 발화한다는 것, 그것은 그 자체로 지극히 정치적인 행위다. 물론 예술은 정치적일 수 있다. 그러나 《송곳》이 수행하는 정치성은 타자에 대한 입체적 이해로 나아가는 대신, 이미 정해진 진영의 정답을 향해 인물들을 줄 세우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끔찍하리만큼 폭력적인 지점은, 실제 사건을 소재로 삼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파업의 대열에서 끝내 버티지 못하고 일상으로 복귀해야만 했던 사람들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파업을 중단하고 일터로 돌아간 이들에게도 각자의 생계가 있었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었으며, 한 인간으로서 감당해야 했던 실존적 공포가 있었다. 그러나 진영의 대의에 복무하는 이 서사 안에서 그들의 개별적 사정은 비겁함이나 배신, 혹은 계몽되지 못한 어리석음으로 납작하게 축소된다.
《송곳》이 위험한 것은 바로 그 폭력성이 ‘사려 깊은 척하는 어조’로 포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인간에 대한 비정함이나 운동권 내부의 모순까지도 냉철하게 응시하는 듯한 포즈를 취하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자기 진영의 도덕적 우월성을 더욱 정교하게 방어하기 위한 수사적 알리바이에 불과하다. 사려 깊음의 ‘포즈’와 진짜 사려 깊음은 구별되어야 한다. 진짜 사려 깊음은 내 진영의 논리로 포섭되지 않는 한 사람 한 사람의 구체적인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보는 데서 시작되지만, 최규석에게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다. ‘우리 진영만이 옳다’는 완고한 편협함이 인간에 대한 호기심을 이미 압살해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발터 벤야민의 오래된 통찰을 변주해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인 것을 미학적으로 치장하여 감정의 동원을 꾀할 때, 그것은 예술이 아니라 프로파간다(선전선동)가 된다. 왜 우리는 진영논리에 깊숙이 파묻힌 프로파간다를 두고 예술이라 칭하며 감동해야 하는가. 인간을 진영의 도구로 수단화하고, 대열에서 이탈한 구체적 개인들의 삶에 문학적 폭력을 가하는 서사가 어떻게 윤리적일 수 있는가. 단언컨대 《송곳》은 별점 1점조차 아까운 작품이며,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더 좁고 사납게 만든다는 점에서 세상에 해로운 예술이다.
그리고 이 서글픈 희극의 대미는 작품 바깥의 현실에서 완성된다. 평생 진영논리에 기대어 성장을 거듭하고 찬사를 독식했던 작가가, 훗날 그 진영 내부의 엄숙주의와 정치적 올바름의 칼날에 의해 스스로 비난의 대상이자 ‘피해자’가 되었을 때 그가 보여준 반응은 실로 아이러니하다. 자신을 향한 진영의 공격을 경험한 뒤 그가 내놓은 후속작이 다름 아닌 대중의 집단적 광기와 린치를 다룬 《지옥》이라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는가.

타인을 재단할 때는 ‘정의로운 계급의식’이었던 것이, 자신을 향할 때는 돌연 ‘대중의 맹목적인 광기’가 된다. 그는 한때 타 진영을 적대시하며 도덕적 우위를 점했고, 같은 진영에서 자신을 욕하자 이제는 그들을 ‘광신도’라 부르며 조롱한다. 《송곳》에서 《지옥》으로 이어지는 이 궤적 어디에도, 자신이 가담하고 구축했던 그 편협한 세계관에 대한 뼈아픈 자기성찰은 존재하지 않는다. 남을 심판하는 자리에서 남을 조롱하는 자리로 이동했을 뿐, 그 자신이 타자의 고통에 무감각했던 순간들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더 나은 인간으로 갱신하려는 의지는 끝내 읽히지 않는 것이다.
결국 한 작가의 윤리는 그가 누구를 비판하는가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어떻게 의심하는가에서 증명된다. 타인의 창작물을 빌려와 시대의 총아가 되었던 출발선에서부터, 파업 현장의 복잡한 인간들을 진영의 도구로 납작하게 밀어버린 《송곳》을 거쳐, 자신을 비판하는 대중을 광신도로 타자화한 《지옥》에 이르기까지, 최규석은 단 한 번도 자신의 오만과 정면으로 마주한 적이 없다. 타인의 목소리를 듣지 않는 자가 타인의 고통을 대변하겠다고 나설 때 탄생하는 괴물 같은 서사—우리가 《송곳》이라는 기만적 프로파간다에 이제 그만 작별을 고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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